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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윤택관련] 문화가 화해 공존 이끌어야
출처 서울경제 게시일 2017.03.14

"편 가르는 진영논리 더이상 안먹혀...문화가 화해·공존 이끌어야"

[특별인터뷰] 이윤택 연극 연출가

오늘의 광장은 개인·공동체 공간...이데올로기는 설자리 잃어
헌재 만장일치 탄핵 인용은 정의·양심이 힘 발휘했다는 증거
상대적 박탈감에 들썩인 태극기 세력 이용하는 정치권 한심
시대적 화두는 용서·화해...지금이 문화가 기능을 해야 할 순간



“시민들이 새로운 세상을 본 마당에 이제 시대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광장에서 대립과 분열이 드러나고 있지만 화해할 수 있습니다.”

12일 국내 대표 연출가 이윤택(65)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쓰고 연출한 굿극 ‘씻금’의 마지막 공연이 서울 명륜동 30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3㎞ 남짓 떨어진 청와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동 사저로 떠날 채비를 한다는 소식에 온통 어수선했건만 세상의 액운을 씻어내는 ‘진도 씻김굿’ 소리가 공간을 메웠던 이곳은 오히려 적막감이 돌았다. 극의 마지막 장면, 액막이 소리의 여운을 음미하듯 진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던 이 감독이 천천히 입을 뗐다.


“새로운 세기가 열렸습니다. 탄핵 이후 시작된 대선 정국에서 진영 논리를 앞세운 후보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많은 지지를 받는 대선주자들을 보면 누구 하나 진영 논리를 내세우려 하지 않잖아요.”

그의 논리는 이렇다. 박정희 정권이 상징하는 군사 문화와 새마을운동이 국민의 두뇌 회로를 지배하던 시대, 4·19 혁명이 상징하는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 그리고 그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했던 시대가 이제야 막을 내렸다는 것.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구시대의 잔재가 남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다. 이 감독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상징하는 군부 문화라는 것이 뿌리 뽑혔고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무너졌다”며 “국가주의가 무너진 시대 국민이 아닌 무엇이 이 사회를 이끌지 상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대 서사가 사라진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논한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 교수는 지난해 방한 강연에서 “꿈을 꾸는 것뿐만 아니라 꿈을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허상을 없애고 궁극적인 사회 현실을 생산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감독의 진단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정치의 변화를 이끈 건 시민사회의 변화였다. 이 감독이 주목한 것도 광장의 변화다. 이 감독은 “과거의 광장은 지식인의 광장이었고 집단적인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현장이었다면 오늘의 광장은 개인과 공동체가 스며든 공간”이라며 “혁명과 축제가 만나고 정치가 삶으로 수렴되는 이 공간에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편을 가르는 진영 논리가 먹혀들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헌재 판결 이후 광장은 판결에 불복한 세력과 탄핵 지지 세력이 맞붙으며 대립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이 감독은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이 감독은 “만장일치 탄핵 인용은 헌법 기관의 판단이기 이전에 시대의 정의와 양심이 힘을 발휘했다는 증거”라며 “지금 광장의 태극기는 상대적인 박탈감에 기인한 것인데 상대주의적인 저항은 반대편이 소멸되면 사라지게 돼 있다”고 진단했다. 수평을 이루던 촛불이 사라진 공간에 태극기만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오히려 상대주의에 의존하는 태극기 세력을 정치 세력화하려는 정치권이 한심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문화인들의 역할이다. 이 감독은 “싸움과 대결이 아닌 화해와 공존의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 이게 문화의 역할”이라며 “서로 매듭을 풀자, 씻자, 서로 살자. 이런 메시지를 던져줘야 하는 지금이 문화가 기능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상상에서 국가주의를 대신할 중심축은 민족성의 회복이다. “문화공동체라는 것은 무정부주의적이지만 이 시대의 요구에 부합합니다. 지난 몇 개월간 광화문 광장이 보여준 것은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이었죠. 한민족을 만드는 것은 우리 고유의 전통이고 이 전통을 이어가는 건 저같이 나이 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한국 연극의 원형인 굿을 계속해서 무대화시키는 이유입니다.”


그는 여전히 블랙리스트 1호 문화예술인으로 불린다. 지난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작성한 9,473명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되기 전에도 그는 꾸준히 정치적 검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해왔다. 지난해 2월 이 감독이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30주년 기자간담회에서는 “개판의 시대에는 깽판으로 가겠다” “이제는 제대로 싸워보겠다” 식의 날선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실제로 문체부의 각종 공연예술 지원 사업에서 그는 숱한 고배를 마셨다. 2015년 1월 문체부 산하 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문화창작기금 희곡분야에 제출한 그의 시극 ‘꽃을 바치는 시간’이 100점 만점을 받고 1위에 올랐는데도 문체부 압력으로 최종 탈락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고교 동창인 문재인 후보의 TV 찬조연설을 했던 것이 빌미가 된 것으로 당시 분석됐다.

전 정권에서 불이익을 당했던 그에게 헌재 판결 이후 자연스레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인사도 늘었다. 그가 문재인 캠프에 합류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돈다. 그러나 이 감독은 오히려 자타공인 ‘정치적 허무주의자’다. 문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안티테제(Antithese)이고 제도의 틀을 벗어나려 한다는 게 이 감독의 평소 지론이다. 새 정부가 수립해야 할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성을 조언해달라는 요청도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 감독은 “나는 정치라는 것 자체가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정의가 필요한데 그게 문화고 문화의 힘으로 맞서는 것이 내 일”이라고 강조했다.

예술인들은 탄핵 판결이 나기까지 광화문 광장에서 난장을 벌이며 정치적 검열을 규탄했다. 이 감독 역시 1월 공연예술인들이 촛불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해 열었던 천막극장 ‘블랙텐트’에서 씻금을 공연했다. “백발의 노병이 된 심정으로 광장에 나가겠다”며 광화문으로 향했던 그는 ‘블랙텐트’ 연출가 중 단연 최고령이었다. 이제 그들에겐 무슨 책무가 주어졌을까. “탄핵이 기각됐다면 할 일이 더 많았겠지요. 하지만 인용됐잖아요. 이제는 시대가 정의의 편에 선 것이고 문화인들의 역할은 끝난 겁니다. 문화는 정치 밖에서 화해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이끌어주면 됩니다. 마무리까지 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 이후는 정치와 시민사회의 몫이죠.”

이날 ‘씻금’의 마지막 장면에서 씻김을 받고 극락으로 향하려던 구천의 망자들이 외친다. “인자 왔는갑다. 진도 앞바다에서 못 찾은 사람들 이제 오는 갑다.” 세월호를 연상하는 배가 등장하고 진양조의 장단 속에 길닦음 소리가 시작됐다. “제보살이라고나 나무여 어어어…” 관객석 곳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가 썼고 숱하게 들었지만 그에게도 이 대목은 특별하다. “우리 굿의 구조를 보면 복수가 아니라 씻금(씻어내는 것)이고 공생입니다. 우리의 시대적 화두는 보복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용서하고 화해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전통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을 우리 연극에 녹여내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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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daily.com/NewsView/1ODD9MQQGL
출처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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